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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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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회 지하투쟁의 별, 조선혁명가 김산②
2007년 12월 31일 16시 09분  조회:4770  추천:50  작성자: 김성룡

           

1927 9 9 팽배가 농민봉기를 일으켜 창설한 해륙풍 쏘베트지구는 광동성 해풍과 륙풍 현을 포함하고 있다. 해륙풍 사람들은 교도단에 15 조선혁명가들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조선동지들을 환영하는 대회를 열었다.

광주봉기 부대는 로농홍군 4사로 개편하고 사장은 엽용이 맡았다. 정치와 군사경험이 풍부한 조선혁명가들도 각자 자기의 임무를 맡고 쏘베트 정부 사업에 참가하였다.

 

(권립 교수) 1928 해륙풍 쏘베트 구역에 도착한 김산은 해륙풍 당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쏘베트구역 보위전투가 시작되자 손에 총을 잡고 싸웠습니다. 그후 8월에야 당의 지시를 받고 철수하기 시작했는데 구사일생으로 향항을 거쳐 1929 봄에 북경에 도착했습니다.

 

1928 1 21 해륙풍에 중국공산당 동강특위(东江特委) 당학교가 설립되였다. 김산은 학교 당위원회 위원으로 교수계획 제정에 참여하였다. 학교에서는 레닌주의 리론, 쏘베트건설, 3국제와 세계혁명, 중국공산당 당사, 군사상식, 선전기술 교수내용을 설치하였다.
 

동강당학교 명단에는 네명의 조선혁명가 이름이 명확히 밝혀져있다

 


장북성은 김산이 이시기 사용했던 가명이다

 

조선혁명가 김산은 학교의 로동운동사와 공산국제 공산국제 활동사를 강의했으며 선전사업을 주로 하였다. 다른 조선혁명가 오성륜은 군사지휘부의 성원으로 있으면서 당학교의 군사강의를 맡기도 하였다. 이시기 김산은 혁명재판위원회 사업을 맡아보면서 7명으로 구성된 혁명법정의 일원으로 일했다.

이해 5 적들은 다시 10 대군을 모아 해륙풍 쏘베트 근거지를 공격해왔다. 거듭되는 전투와 실패속에서 전우들은 모두 헤쳐졌다. 구사일생으로 혜래(惠来) 도착한 김산은 폭포밑 동굴속에 숨어있는 팽배와 정지운(郑志云) 만났다. 김산은 팽배의 지시에 따라 향항으로 피신하기로 하였다. 그는 나룻배를 타고 삼엄한 적의 경계를 피해 산두에 간후 일본화물선 타가야마 마루호를 리용해 향항으로 가게 되었다.

김산은 향항에서 인삼장사를 하고있는 박씨의 도움으로 다시 상해에 가게 되었고 상해에서 김성숙, 오성륜 그리고 박진혁제를 비롯한 광주봉기에 참가했던 조선혁명자들을 만났다. 1929 김산은 전우들과 작별하고 상해를 떠나 다시 북경으로 향했다.

북경시 당위원회 조직사를 펼치면 김산은 1929 5월부터 류청화(刘清华)라는 이름으로 주국공산당 북평시 당위원회 조직부장으로 사업하였다는 기재가 있다. 북경에서 김산은 본격적인 지하투쟁을 전개하고 북경대학을 중심으로 학생운동을 령도하였다. 그는 북평녀자사범대학 당지부 활동을 지도하였고 연경대학, 공과대학(工科大学) 사업을 지도하였다. 1930 4 중순 북평시 당위원회에서는 5.1국제로동절 경축대회를 열기로 결정하였다. 북평시 당위원회의 지도성원인 김산은 선후로 여러 대학을 다니면서 비밀리에 당원회의를 소집하면서 대회준비에 몰두하였다. 여러 대학에서는 학생시위를 하고 대회연설을 하며 선전과 표어를 만들었다.

김산이 자취를 남긴 20세기 30년대 북경대학은 지금의 북경시 5.4대가 29번지에 위치해있다. 2003 9 19 답사팀은 김산의 아들 고영광(高永光) 선생을 만나 함께 김산의 유적을 찾아 다녔다. 국가경제위원회 기술국 부국장으로 사업했던 고영광 선생은 매우 검소하고 성격이 강의한 사람이였다. 걸음이 날렵하고 말쑤가 적은 그는 , 담배를 하지 않고 산책을 하며 또한 수영을 무척 즐긴다고 했다. 정열에 눈과 검붉은 피부색을 가진 그의 모습에서 우리의 혁명자 김산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북경대학 옛터에는 당시 학교청사로 사용되였던 4 건물이 남아있다. 붉은 벽돌과 붉은 나무로 창틀, 문틀로 하여 전반 건물이 붉은 색을 띠여 사람들은 홍루(红楼)라고 부른다. 1898 이곳에 경사대학당(京师大学堂) 있었고 1912 북경대학으로 고쳤다. 홍루는 1916년에 축조된 () 자형 건물이다. 5.4운동시기 리대소와 진독수가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모택동도 이곳에서 활동하였다. 그러므로 이곳은 중국의 공산주의를 전파하던 요람으로 간주된다. 김산은 북경의 학생운동을 령도하기 위하여 이곳에서 많이 활동하였다. 그는 북경 대학생들의 5.1 기념활동을 조직하기 위해 이곳에서 학생대표를 만나 비밀회의를 하였다. 지금의 북경대학은 1952년에 해전구로 옮겼다.

답사팀 력사고문인 최룡수 교수는 홍루를 소개해 주었다.

 

(최룡수 교수) 여기는 옛날 북경대학입니다. 중국 신문화운동의 중심지입니다. 5.4운동시기 리대소, 진독수가 이곳에서 교편을 잡았는데 조선류학생과 혁명자들이 많습니다. 조선혁명가 량명, 리륙사 등이 그 대표인물입니다. 이곳은 1930년도 김산이 북경대학 학생운동을 지도할 활동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그는 학생간부들과 함께 5.1 기념활동 준비했습니다. 학생대표를 만나 회의를 했지요.

 

1930 4 20 5.1 기념대회 준비회의가 북평청년기독교회 강당에서 열렸다. 김산은 북경대학 학생대표뿐만 아니라 기타 대학의 학생대표들을 모아 준비회의를 소집하였다.

홍루에서 남쪽으로 얼마간 걸으면 동단북대가(东单北大街) 이른다. 그곳에는 중국풍과 융합된 서양식 기독교회 건물이 있었다. 기독교 청년들이 많이 활동하던 이곳이 바로 북평청년기독교회 옛터이다. 1930 조선인 기독교 신도들도 이곳에 자주 모였다고 한다. 김산은 이곳에서 기념대회 준비회의를 열었다. 그는 밀정과 경찰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구체적인 보안사업을 포치하고 회의를 순조롭게 마쳤다. 이튿날 회의에는 김산의 련인이였던 제숙용(齐淑容) 참가하였는데 경찰들의 습격을 받았다. 학생들은 미리 준비해둔 엽전과 석회가루를 뿌리며 경찰에 대항하였고 경찰들이 눈을 뜨지 못하는 사이에 대부분 빠져나갔다.

 (최룡수 교수) “이곳은 북경시 청년기독교옛터입니다. 1930년에 전문 레배당을 조선족이 많이 리용했지요이때 김산이 북경 조직부장할  여러대학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 놓고 4 20일에 5.1 경축준비회의를 했습니다이곳에서 김산은 모든 문을 닫고 구체적인 보위사업을 지시했습니다이튿날 그는 다음 회의에는 직접 참가했지 않았지만 그의 연인 제숙용이 참가했습니다그런데 뜻하지 않게 경찰들에게 발각되였지요그들은 미리 준비한 엽전석회가루를 경찰들에게 뿌려 경찰들이 눈을 뜨지 못할  여러저기로 도망하였습니다제숙용을 비롯해 50여명이 체포되였습니다이곳은 또 조선인들이 3.1운동 기념활동을 가지기도 했던 곳입니다.

당조직사에 나오는 류청화는 김산의 가명이다

북경대학 홍루앞에서(가운데 김산의 아들 고영광씨)

 

북경의 옛 청년기독교건물

김산의 련인이였던 제숙용

 

5.1 기념행사가 있은후 김산은 당의 지시에 따라 동북에 파견되였다. 1930년의 동북은 그야말로 암흑의 세상이였다. 장작림의 봉건군벌이 통치하고있지만 도처에 비적이 살벌하였고 일본 주둔군이 거리를 횡행하고있었다. 동북에 이주한 많은 조선이민은 각가지 억압과 수탈을 받으며 생활고에 허덕이고있었다.

김산은 심양에서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대표를 만나 중국공산당과 조선공당 사이의 련계를 건립할 문제를 토의하였다.

 

(권립 교수) 북경시위 조직부장으로 당선된 김산은 중공 북방국으로부터 중공과 조공과의 관계처리문제, 조공당원의 중공가입문제를 도와주라는 특수임무를 맡았습니다. 김산은 길림지구 안동지구의 조공조직을 시찰했고 길림지구에서는 엠알파 회의에 참가한적이 있습니다. 엠알파 조공은 김산 등의 방조하에 해산을 선포하고 개벌적으로 중공에 가입했습니다.

 

김산은 다시 길림으로 갔다. 그는 조선혁명청년동맹 대표의 신분으로 길림에서 소집된 중국 한인청년동맹(韩人青年同盟) 2 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길림성 각지 조선공산당 대표들이 모인 대회에서는 농민투쟁 로선을 확정하였다. 회의에서는 조선인 농부들을 이끌어 중국 농민과 함께 중국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농민투쟁을 진행하기로 확정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조선인, 중국인 농민동맹을 조직하였다. 김산의 주장은 80여명 대표들의 심금을 울려주었고 그들의 정치적 각성을 높여주었다. 개인적인 분쟁만 하던 사람들은 협조와 단합을 강조하게 되었고 명확한 행동방침이 있게 되었다. 그후 김산은 만주 조선농민동맹 3 대표대회에 참가하고 단동으로 가서 조직을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7명밖에 없던 단동 당지부는 20 당원을 가진 지하당조직으로 확대되였다.

동북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북경에 돌아온 김산은 함께 투쟁하던 중국의 녀혁명가와 사랑을 맺게 되었다. 김산이 <아리랑> 회억록에서 류령(刘铃)이라고 밝힌 그녀의 실명은 제숙용이였다. 제숙용은 리대소가 발전시킨 진보적인 혁명가로서 당시 북평 여자사범학교에서 지하당 활동을 하고있었다. 김산은 한차례 비밀회으에서 그녀를 알게 되었고 그들은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 혁명가는 서로 의자하면서 사랑을 나누었고 북해공원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손을 맞잡고 북해공원을 거닐었다.

2003 9 15, 홍루를 찾아가기전 전날 답사팀은 향산의 유적지를 답사하였다. 향산공원 부근에 김산이 맑스레닌주의 리론을 가르치던 곳이 있었다.

북경시 향산 남영자(南营子) 53번지, 기개에는 서산양황기(西山镶黄旗) 남영 13번지로 기록되여있지만 건물은 지금의 향산 남영 11번지로 변해 있었다. 최룡수 교수는 이곳 유적지를 이렇게 소개했다.

 

(최룡수 교수) 이곳은 향산공원 밑에 있는 향황기 남영 13번입니다. 김산이 북경의 조직부장을 할때 제숙용과 함께 이곳에서 강습소를 꾸렸습니다. 김산은 공산당 기초지식과 맑스레닌주의 리론을 강의했습니다.

 

1930 , 중공 북평시 당위원회에서는 이곳에 당원 강습소를 세웠다. 김산과 련인 제숙용은 함께 강습반에서 기초지식과 맑스주의 리론을 강의하였다. 강습반은 조진중(赵震中), 양홍포(杨洪浦), 류정재(刘静斋), 방성오(方星五) 많은 우수한 중국인 공산당원을 양성해 냈다.

 

(최룡수 교수) 김산이 북평시 조직부장을 했단 것은 당사자료에 나옵니다. 1980년도 김산이 꾸린 강습반에 참가했던 조진중을 만났는데 조진중에게서 남영자라는 주소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후 십여차 찾아와 향산판사처에 가서 전문가에게 문의하고 뒷골목의 백세 로인을 만나 남영자 13번이 원래는 청나라 병영이고 후에는 소학교가 있었던 자리임을 확인하게 되였습니다. 아래에 학교가 있었는데 수차 전문가와 로인분들을 찾아 확인되였지요. 확정한 시간은 2002년입니다. 여기까지 찾아온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당원학습반 자리를 설명해주는 최룡수 교수

당원학습반 사적지 주소번호

김산이 쓴 소설 《기이한 무기》

당원 강습반 유적지는 중앙당학교 최룡수 교수가 발견하였다. 1980 강습반을 다녔던 조진중 로인을 알게 최룡수 교수는 그에게서 학교 주소와 당시 김산과 제숙용이 강의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이다. 그후 향산부근에서 수십차례 확인을 거쳐 드디어 남영자 13번지를 확정하게 되었다.

이해 김산은 북경에서 염광(炎光)이라는 필명으로 단편소설 <기이한 무기(奇怪的武器)> <新东方>잡지 1 4기에 발표하였다. 소설은 사실주의적으로 조선의렬단원 온성륜의 투쟁과 리봉창의 의거를 부각한 작품이다.

1 국내혁명이 실패한 많은 사람들은 실망하고 방황하였지만 김산은 드팀없는 신념으로 계속 투쟁을 견지하였다. 그는 실패의 상흔을 안고 단연히 북경에서 위험한 지하투쟁을 진행하였던 것이다. 그는 당원 강습소를 세우고 학생운동을 령도하였으며 당조직을 확대시키는 많은 일들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계속 간고한 투쟁을 견지해야 했고 뜻하지 않게 드닥칠 더욱 위험을 감당해 나가야 했다. 언제 어디서 어떤 변을 당할지 누구도 모르지만 일본침략자들과 싸우고 봉건주의와 싸우며 중국인민과 조선인민을 항쟁에로 이끄는 투쟁은 멈출수 없었다.

동강당학교 명단에는 네명의 조선혁명가 이름이 명확히 밝혀져있다

장북성은 김산이 이시기 사용했던 가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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